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구려-당 전쟁 (문단 편집) === 당나라의 전쟁 준비 ===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3ffd6400bc40c31678cee570fc8c2e92.jpg]] [[백제부흥운동]]이 기세를 더하던 시기이긴 했지만, 660년 겨울 [[고종(당)|당고종]]은 고구려 원정을 발표하고 병모를 모집하기 시작한다. 최종적으로 동원한 규모는 대략 '''35개군'''. 각각 도행군의 진격로는 미상이나 대체적으로 소사업과 정명진이 이끄는 부대는 육로, [[소정방]] 부대는 해로로 전진한 것이 확실해 보이며, 그 외에 임아상, [[방효태]]가 지휘하는 부대도 해로 쪽으로 움직였을 가능성에 비중을 두고 있다. 글필하력이 지휘한 요동도행군의 진격로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제시되었으나, 최근 연구에 의하면 해로를 통해 압록강으로 침공했다는 가설이 힘을 받고 있다. 아울러 당나라에 숙위하던 [[김인문(신라)|김인문]]을 귀국시켜 막 즉위한 [[문무왕]]에게 고구려 공격 사실을 알리고 출병을 요구하였다. 이에 신라측은 [[문무왕]]이 직접 남천주로 나아가 옹산성과 우술성[* 지금의 [[대전광역시]] 회덕 산성, 계덕 산성] 일대의 백제 부흥군을 진압하고, 웅현성을 축성하면서 웅진성에 주둔하던 당측 장수인 유인원과 연결선을 다시 이은 후 주력군을 차출해 북벌군을 편성하면서 고구려 일대의 전황을 살피기 시작한다. 세 가지 기록을 정리해 보면 '''요동도행군 : [[글필하력]], 평양도행군 : [[소정방]], 패강도행군 : [[임아상]], 부여도행군 : 소사업, 누방도행군 : 정명진, 옥저도행군 : [[방효태]]'''로 주요 지휘관이 결정된 듯 하다. 또한 여기에 더해 함자도, 압록도, 낙랑도, 장잠도 등에도 동급의 지휘관이 편성되었다. 전 병력은 35군으로 편제되는데 1개 군 = 최소 5,000명이라는 《당육전》의 기록을 생각하면 35개 군은 약 17만 5천, 특수 임무를 맡은 군의 경우 규모가 확대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20만 내외가 하한선이 되겠지만,[* 《당육전》에는 최대 10,000명 이상의 부대로 증편될 때까지 고려하여 장교 배치를 달리하도록 명시되어 있다.] 백제 원정군의 14군의 규모와 편제로 볼 때 고구려 원정군의 진용과 35군의 숫자에 들어맞는 병력 수는 35만이 합당한 듯 보인다.[* 이민수, 「660~661년 당의 고구려 공격군 편성과 水軍 운용 전략」 한국고대사탐구 38, 2021, 137~142쪽.] 정확한 수치를 명기하지 않아서 그렇지 편제 규모로 볼 때 당나라 역사상 고구려를 상대로 한 것 이상의 규모의 원정대는 없다시피하다. 더욱이 주 공격로가 해상로를 이용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무작정 많이 보냈다가는 전력이 제대로 전개되어보기도 전에 몰살될 수도 있다. 상륙 작전은 고금을 통틀어서 공격자 입장에선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전년도에 백제 정벌에 나선 소정방의 13만 신구도행군은 이름만 평양도행군으로 바뀐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평양성 공격에 나섰는데 고구려 원정군에는 소정방과 동급 이상의 사령관이 4명 이상 등장한다. 이게 얼마나 엄청난 규모인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면 현대의 [[인천 상륙작전]] 때 동원된 [[유엔군사령부|UN군]] 병력이 75,000명이었다. 즉 인천 상륙 작전에 동원된 병력의 약 두 배~세 배에 해당하는 병력이 패수로 진입하여 수도인 [[평양성]]을 공격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